엄춘보 한일철강(주) 명예회장이 2월7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96세. 이제 철강업계에 고인은 있지 않지만 한국철강업과 평생을 함께 해온 철강업계 어르신의 빈자리는 점점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한일철강의 창업주 故엄춘보 명예회장을 기리며 글을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주]

유통대리점에서 제조회사로

1974년 엄회장이 평안도 용천에서 월남한지 27년, 그리고 한일철강이 을지로에 창업 한지 17년이 되는 해, 엄회장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된다. 한일철강이 창업당시 50만원이었던 자본금은 6년만에 20배, 1974년에는 다시 그것의 6배로 늘어나자 유통에서 벗어나 제조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2천평 등촌동 부지에 경량 형강을 생산할 수 있는 성형기를 설치하고 서까래용 건축자재로 보급시키고자 C-형강을 선택했다. 이것은 ㄷ자 모양의 형강으로, 파이프를 제조하는데 있어서도 기본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형태였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꾸준히 다니면서 마음속에 두었던 사업구상의 첫 단추였다. 그 당시 국내에는 C-형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산 C-형강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C-형강을 생산해보니 일단 규모면에서 단조로왔다. 한 마디로 양이 차지 않은 엄회장은 파이프를 생산하기고 결정하고 1976년 등촌동에서 가까운 가양동에 6천평 부지에 공장을 짓는다.

강관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엄회장은 당시 강관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전환하게 된 기아산업의 조관기를 인수하게 된다. 기아산업은 195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인 삼천리 자전거를 생산하던 업체로, 자전거에 사용되는 강관을 직접 생산했던 기업이다. 한일철강의 강관 역사를 따지자면 기아산업의 강관역사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일철강 1970년대 가양동 공장
▲ 한일철강 1970년대 가양동 공장


철강제품은 품질이 최우선이다.

조관기로 파이프를 생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관은 철판이 둘둘 말려있는 코일을 철단기로 원하는 크기로 잘라서 용접하여 만드는데, 가로로 자르는 것을 Shear Line, 세로로 자르는 것을 Slitter Line 이라고 하는데, 당시 국내 절단기 수준이 좋지 않아 정확하게 재단하기가 어려웠고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제품과 품질을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엄회장은 그동안 일본회사를 방문했을 때 보아둔 절단기를 눈여겨보았고 절단기를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큰 가격차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Shear Line을 국내 최초로 설치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겠다는 엄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긴 것이였다. 탄력을 받은 강관제조는 이후 두 번째 조관기와 슬리터 라인도 설치하게 된다. 이후 조관기는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품목도 다양해졌지만 절단면이 미려하고 규격이 정확하게 나오면서 품질이 좋아졌다. 당연히 소비자들에게도 파이프는 한일철강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각인하게 된다. 1982년 4월에는 KS인증도 획득하면서 한일철강은 자연스럽게 매출도 상승한다.

강관생산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켜 자신감은 얻은 엄회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포항제철이 거대 제철소로서 성장할수록 원자재인 코일을 공급지에서 바로 받아 가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 엄회장은 1982년 포항시 괴동동에 3,600평 규모의 코일센터를 지었다. 코일센터 건설 후 물량이 계속해서 증가하자 3년 후에 다시 포항시 장흥동에 1만3천평에 2공장을 짓게 된다. 이로써 가양동 강관공장과 포항의 코일센터가 한일철강의 두 바퀴처럼 이끌고 있었다.

포항의 2개 공장도 정상적으로 본 궤도에 오르자, 한일철강은 1988년 기업을 공개하고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하게 된다. 1991년 7월에 엄회장은 둘째아들인 엄정헌대표이사(현재 한일철강 회장)에게 대표이사직을 물려주었다. 현재의 한일철강 본사 건물을 신축한 것도 이때이다.

한일철강 포항공장
▲ 한일철강 포항공장


동서로 회사의 축을 연결하다.

1980년대가 한일철강의 도약기였다면 1990년대는 성장기였다.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강관을 판매하였는데 파이프 수요가 계속 급증하자 엄회장은 오산에 5,500평 부지에 강관생산라인을 갖추고 슬리터 라인도 설치하여 철판절단과 파이프를 동시에 생산하게 했다.

포항을 중심으로 한 동쪽과 오산공장을 중심으로 한 서쪽 그리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기존 파이프 이외에 제품이 다양해지자 매출은 더욱 크게 증가하였다. 오산공장 준공으로 포항, 서울공장과 합하여 쉬어라인 8개라인, 슬리터라인 3개 라인이 갖추어짐에 따라 명실공히 철강 외길을 걸어온 엄회장의 생각했던 제조회사로서 큰 틀이 잡힌 것이다.

한일철강 1980년대 오산 공장
▲ 한일철강 1980년대 오산 공장


인천 남동공단 시대를 열다.

하지만 변화는 계속되었다. 철강산업은 유난히 큰 소리와 환경 오염등이 발생할 수 있어 이를 방지하는 시설도 필요했다. 가양동에 공장이 들어설 때는 주변이 모두 농지여서 조용했으나 세월이 흘러 주택과 빌딩이 공장 주변에 들어섬에 따라 공장이 먼저 들어섰지만 어쩔수 없이 공장은 서울시 정책에 따라 이전하지 않으면 안됐다.

1992년 남동구 고잔동에 7천평 부지를 매입하여 파이프설비를 우선 옮겼다. 1995년 10월에는 6천평을 매입하여 코일센터를 준공했다. 이후 계속 부지매입을 하여 인천에만 파이프공장 2곳과 코일센터 1곳, 물류센터 1곳이 생긴 것이다. 또한 인천 구월동과 간석동에 주공아파트들을 매입하여 사원아파트를 마련했다. 바야흐로 한일철강 인천 남동공단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일철강 인천 코일센터
▲ 한일철강 인천 코일센터


1994년 인천공장에 들어온 조관기는 12인치 강관을 생산할 수 있는 조관기로 시운전부터 철강업계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기계의 중요부품은 오스트리아 뵈스트알피네에서 제작한 것으로 일본의 산요세키와 한국의 대현테크 그리고 독일의 크라우트크라머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하였는데 중요한 부분은 모두 완전 자동화로 이루어져 효율성과 생산극대화를 이루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투자였으며 성공을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이다. 이로서 인천공장 생산능력은 소형조관기를 포함하여 4대의 조관기가 1일 10시간 기준으로 연간 10만5천톤을 생산하게 되었다. 당연히 강관업체들이 너도나도 한일철강의 생산라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 지금은 많은 회사들이 조관기의 자동화가 이루어졌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철강원로들이 한일철강이 지금도 타사의 롤모델이 되고 58년 줄곧 철강 외길을 걸으면서도 성장을 거듭 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엄회장의 이러한 미래를 보는 시야와 한 번 결정하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평안도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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