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한국 철강 유통업계의 구조적 취약성이 뚜렷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철강사와 수요산업 사이에서 가격과 재고를 완충하는 ‘중간 Buffer’ 역할만으로도 시장 내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최근 내수 수요 위축과 수입재 공세, 직거래 확산이 겹치면서 단순 유통 중심 구조로는 더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국내 유통시장은 이미 정점이던 2,000만 톤대 거래 규모에서 최근 1,300만 톤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건설 경기 침체와 조선·자동차 등 주요 수요산업의 부진, 그리고 중국·일본산 철강재의 저가 공세가 동시에 맞물리며 유통시장의 수익 기반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특히 철강사는 대형 실수요업체와 직접 거래를 확대하면서, 중간 유통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고 있고, 중소형 유통업체는 재고와 금융 부담을 홀로 떠안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이러한 유통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번째는 단기·저가 위주의 거래 구조다. 대부분의 유통업체가 단기 매출 확대를 위해 단가 인하 경쟁에 매달리면서, 거래의 지속성과 수익성이 동시에 약화되었다. 2020년대 초반 이후 철강 유통시장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 안팎으로 떨어졌고, 수익구조는 가격변동에 따라 급격히 출렁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거래 기반이 ‘관계’가 아닌 ‘가격’에 머물러 있어, 유통 고객의 충성도 역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두번째는 재고·가격 관리체계의 비효율성이다. 경기 둔화기에 재고 축소가 이뤄지지 않아 자금 압박이 심화되고, 시황이 반등하면 오히려 적정 재고를 확보하지 못해 기회를 놓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실시간 가격·재고 연동 체계가 부재하고, 수요 데이터 기반의 선제적 의사결정 능력이 부족한 것도 주요 원인이다.
세번째 문제는 부가가치 창출 역량의 부족이다. 다수의 업체가 단순 매매 중심의 ‘판매 대행’ 역할에 머무르고 있으며, 가공·물류·서비스 등 부가가치 창출 기능은 일부 대형 유통업체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에 따라 중소형 유통업체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고, 철강사나 대형 고객과의 거래관계 또한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국내 유통업체는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거래의 질, 운영의 효율성, 사업의 확장’ 세가지 축에서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한다.
먼저, 실수요 기반의 거래 존속기간 확대다. 유통업체가 주요 고객과 2~3년 이상의 공급계약을 통해 물량과 가격 안정성을 확보하면, 철강사도 예측 가능한 판매 구조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실제로 장기거래 비중이 높은 유통업체일수록 이익률과 재고 효율이 높게 나타난다.
둘째, 디지털 전환을 통한 관리체계 혁신이다. 실시간 재고·가격 연동 시스템, AI 수요예측, ERP 고도화 등을 통해 시장 변동성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철강사와 유통사간 디지털 플랫폼 연계도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일부 선도 유통업체는 이미 거래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익성을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셋째, 가공·물류·솔루션을 결합한 복합유통 모델로의 전환이다. 절단·가공·포장·납품대행 등 부가서비스를 결합한 ‘가공과 유통’ 통합 모델은 단순한 단가 경쟁을 넘어 고객 맞춤형 가치 제공으로까지 이어진다. 나아가 중소 유통업체간 특화된 가공설비 통합관리, 물류망 상호 공유 등 협업 체계 구축도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제 철강 유통산업의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단순한 가격 경쟁에 머무는 한 미래는 없다. 유통이 단순 판매에서 ‘철강사와 유통업계 또는 유통업계간 상호 협업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 산업’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한국 철강산업 전체의 경쟁력 또한 새롭게 재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