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춘보 한일철강(주) 명예회장이 2월7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96세. 이제 철강업계에 고인은 있지 않지만 한국철강업과 평생을 함께 해온 철강업계 어르신의 빈자리는 점점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한일철강의 창업주 故엄춘보 명예회장을 기리며 글을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주]

엄춘보 명예회장은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7세때 고향을 떠나 만주 대련에서 만주전신전화㈜에서 근무하고 다시 상해에서 상해스탠다드 석유회사에서 근무하였다. 해방되기 4개월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결혼하였으나 해방과 동시에 공산세력에 의해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압박이 심해지자 가족과 함께 해방 후 2년만인 1947년 서울로 남하했다.

엄춘보 명예회장은 평소에 ‘맹호출림(猛虎出林)’ 이라는 말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평안도 사람 기질을 말할 때 쓰던 말로 “맹호는 숲에서 나온 이상 한번 발을 내딛으면 줄기차게 달려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이며, 부지런하고 속임수로 달리지 않고, 편법과 관행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하여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하고 꺾으려면 확실히 꺾어 버리고 포기해 버리려면 단호하게 잘라 버리는 평안도 사람의 기질을 좋아했다. 이러한 성격은 철강사업을 하면서도 그대로 표현되는데 철강업계의 원로들은 사업거래에 있어서도 이러한 엄회장의 확실한 성격이 사업성공의 큰 축이라고 말한다.

<故엄춘보 명예회장 프로필>

생년월일 : 1919년 3월19일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40년 대련중 졸업
1940~1943 만주전신전화(주)
1943~1945 상해스탠다드 석유회사
1955~1957 한국철강상협회 회장
1957~1991 한일철강주식회사 대표이사
1974~2003 한영강재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
1991~2013 한일철강주식회사 회장
2013~2014 한일철강주식회사 명예회장

철강업에 뛰어들다.

엄회장이 철강업과 연관을 맺은 것은 1945년 결혼을 하면서부터이다. 장인은 만주 봉천(심양)에서 선반 70여대를 보유하고 고철을 회수하여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경영에 참여하면서 엄회장이 철강과 첫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엄회장은 공산정권이 들어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과 함께 월남을 하게 된다. 당시 서울 남산동에 살던 삼촌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데 당시 서울은 변변한 회사 하나가 없었고 해방직후 어수선한 가운데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도 넘쳐나 돈을 버는 자체가 생존이었다.

엄회장은 가진돈 4천원을 가지고 을지로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전력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공산정권이 북쪽에서 보내던 전력을 중단하자, 서울은 전력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에 카바이트를 판매하여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사업이 잘 될 무렵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엄회장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고 2년뒤, 서울수복으로 을지로에 돌아온 엄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주택과 건물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건축자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협성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함석(철판에 아연과 주석을 도금한 제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하게 된다. 이후 사업은 주택 복구와 맞물려 크게 번창하게 되고, 신화실업이라는 함석공장에 투자를 하게 되면서 시야와 부를 동시에 넓히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엄회장은 어느 정도 전쟁 복구가 진행되면 함석의 수요가 줄 것으로 예상하고 함석판매를 중단한다. 엄회장은 사업아이템을 철판으로 품목을 바꾸고 1955년에 신화실업에서도 경영에 손을 떼게 된다.

한일철강 창업주 故엄춘보 명예회장
▲ 한일철강 창업주 故엄춘보 명예회장
엄회장은 철판을 판매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른 상품은 가짜가 많고 성분을 속이는 일이 많았지만 철판은 치수만 확인하면 서로 속고 속는 일이 없고 또 유행을 타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주로 일본산 제품과 대한중공업(인천제철 전신)의 제품을 공급받아 사업을 했는데, 매출이 함석을 팔 때보다도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철강제품의 수준은 매우 낮았고 변변한 제철소가 없는 상태로 일본산 제품이 주로 들어와 가공되었다.

엄회장은 일본을 다니면서 일본의 앞선 기술을 보고 크게 느끼고 앞으로의 철강사업을 지금처럼 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철강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도매상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법인을 세우는데, 이것이 1957년 12월에 창업당시 자본금 50만원으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 2가 101번지에 설립된 한일철강 주식회사이다. 을지로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꼭 10년 만의 일이다.

한일철강은 설립되자마자 매출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공급은 적은데 철판을 찾는 수요는 국가재건과 맞물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정부도 1952년 철강업 재건계획과 1956년 철강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철강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후 1968년 포항제철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본격적으로 인천제철의 전신인 대한중공업에서 철판이 나오기 시작하자 1963년 한일철강은 대한중공업 철판대리점으로 선정되었고 안정적인 물량공급으로 인해 매출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공급이 안정되면서 철강 관련업체들도 늘어나게 되는데, 철강사업을 하는 업체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유대관계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엄회장은 업체를 모아 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철강상협회였다. 회장사는 한일철강, 조합장은 엄회장이 맡게되는데 철강업계가 조합을 결성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철강업계가 하나로 모이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조합원은 전국적으로 68명이었으며 당시 조합원 명부등은 회원사의 상호, 대표자, 이름, 주소, 전화번호등이 있어서 당시의 철강업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외자유치가 일본으로부터 들어오고 이에 따라 우수한 일본산 철판이 밀려들어오면서 국산철판을 판매하던 철강업자들은 시장수요에 따라 가격경쟁력이 없는 국내 철판 대신 수입 철판을 판매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철강상협회도 소멸하게 된다.

포항제철 1호 대리점이 되다.

1968년 포항제철소가 발족되고 1973년에 제1기 공장이 준공되면서 처음으로 제품다운 철강재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포항제철의 초기 제품은 품질이 불안정하여 매출부진을 겪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포항제철은 당시 철판 판매량 1위 업체인 한일철강 엄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엄회장이 이를 받아드리게 된다. 포항제철의 제1호 대리점이 된 것이다.

당시에 업계에서 쌓아온 엄회장의 경력, 평판과 영업실적 등이 좋게 평가 받는 순간이었다. 이후 포항제철은 영업망 구축을 위해 전국적으로 5~6곳의 포항제철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대리점을 추가로 선정하게 되는데 한일철강이 경인지역 판매 대리점으로 결정되게 된다.

국내 철강재 수요는 1962년 26만톤에 불과하던 것이 1977년 590만톤, 1978년에 711만톤으로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한일철강도 크게 성장하게 된다. 포항제철과 제1호 대리점으로서 회사는 크게 성장하게 되고 재무구조도 안정되면서 조직과 매출도 크게 성장하면서 회사도 안팎으로 질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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