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불황시대, 문화 카르텔이 필요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경기가 언제쯤 회복될 것인지 여부다. 올해처럼 변수가 많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궁금증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확실하게 경기가 호전될까? 잔인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금의 어려움은 복합불황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과 보호무역주의 확산, 환경과 관련한 글로벌 규제가 외적 요인이라면 노무 안전, 공정거래 강화, 인구감소와 산업구조 재편에 따른 수요 감소, 저가 수입재와의 힘겨운 경쟁은 내부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우리의 노력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요인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 지금의 복잡한 환경변화를 변수가 아닌 상수로 인정해야 한다. 흔한 말로 뉴노멀(New Normal)시대다. 특히 다극화 체제와 통상문제, 환경문제, 인구감소, 산업구조 재편은 1~2년 걸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철강업계는 물론 정부까지 나서서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지난 8월 통과된 ‘K-스틸법’이나 같은 달 경북 포항을 ‘산업위기 선제 대응지역’으로 지정한 것, 가장 최근에 나온 ‘철강산업 고도화방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에 못지 않게 현실적인 법개정이나 제도적 보완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건 정부의 몫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소기업의 인력난과 보세창고 문제, KS 인증 심사기준 강화다.
보세창고 제도는 수출입 물류의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위해 도입됐지만 최근에는 순기능보다 관리 및 통제의 취약성과 수입품의 내수 잠식 가능성, 수입품의 회피수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예를 들어 조선사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과거 2010~12년 호황때보다 외형도 금액도 더 커졌다. 그러나 조선 기자재업체의 매출이나 조선 기자재를 만드는 철강사의 납품은 줄고 있다. 왜 그럴까? 보세창고를 활용, 블럭이나 기자재까지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세창고 제도는 보는 관점에 따라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있다. 그러나 원산지 규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현실에 맞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 보세창고를 가지고 있는 대형 제조사만 이득을 본다는 점 외에도 자동차나 기계, 가전 등 다른 산업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KS인증 절차나 심사도 더 강화돼야 한다. 소위 OECE 선진국 중에서 취득이 가장 쉽다는 얘기는 KS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단면이 아닌가 싶다.
철강사가 해야 할 일은 품질과 원가경쟁력을 키우고 고부가가치화를 강화하는 일이지만, 이것 못지 않게 철강~유통가공~수요에 이르는 생태계 조성 노력이 절실하다. 특히 국민을 대상으로 한 철강은 차갑고, 건축물을 지었을 때 울림이 심하고, 비싸다는 인식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흔히 일본은 수입재가 침투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한다. 왜일까? 까다로운 JIS 인증 절차와 메어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무역상이 수입과 유통을 좌지우지 한다는 점도 있지만, 품목이나 지역마다 결성돼 있는 단체의 노력도 한몫을 하고 있다. 자국산을 우선 판매하고, 저가 수입재를 판매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백기를 들때까지 한 몸으로 공격을 한다. 소위 문화 카르텔이다. 이러한 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메이커가 유통과 실수요가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믿음감을 심어줘야 한다. 최고경영자나 임원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장치산업은 후발주자를 이기기 힘들다. 중국 다음은 베트남, 그 다음은 인도가 될 수 있다. 국산 철강재를 쓰는 것이 가격은 조금 비싸더라도 믿을 수 있고, 납기와 AS, 안정성 등 가격 외적인 이익이 더 많아 굳이 수입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지금 철강업계에 필요한 것은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자세와 문화 카르텔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