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철강산업의 방향은?...민동준 연세대 교수 진단
- 반덤핑으로 규제하고, 수출로 버티는 건 잠시뿐 - 투자·기술·인력 재편이 한국 철강의 생존 조건 - 가성비와 품질 사이, 한국의 경쟁력은 어디? - 주요 수요산업과의 협업 통해 새로운 수요 구조 창출
국내 철강산업이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조선·건설·자동차 등 주요 수요산업의 부진이 장기화되고, 글로벌 공급 과잉이 심화되면서 수익성이 악화되는 등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초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테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고, 지난 4일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은 ▲공급과잉 해소 ▲통상·수입 대응 ▲기술혁신 및 AI 전환 ▲저탄소 전환 ▲상생협력 강화 등 5대 핵심 과제로 구성됐다.
정부는 이를 통해 철강산업의 경쟁 패러다임을 ‘규모 중심’에서 ‘품질·기술 중심’으로 전환하고, 2050년 탄소중립 시대에 부합하는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에 본지는 철강산업경쟁력강화 TF 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동준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부 교수를 만나, 국내 철강산업의 구조적 한계와 향후 대응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철강 불황...일시적 침체 아닌 장기 사이클로 봐야
민동준 교수는 현재 철강산업의 위기를 “방학 숙제를 안 한 채 개학일을 맞은 학생 같다”고 표현했다.
민 교수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수출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지만, 내수 기반은 약화됐고, 구조조정은 미뤄졌다”며 “감산, 기술개발, 탄소중립 같은 과제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논의됐지만, 실행은 더뎠다”고 지적했다.
민 교수는 특히 이번 불황을 일시적인 경기 침체가 아니라 구조적인 장기 사이클로 내다봤다. 과거처럼 2~3년 버티면 돌아오는 사이클이 아닌 산업의 체질이 바뀌지 않으면 회복은 불가능한 것이다. 예전처럼 내수 부진을 수출로, 중국 둔화를 동남아 시장으로 보완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진단했다.
이어 “한국 철강산업이 구조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단기적으로 수입규제나 환율·가격 효과에 의존해 시장을 방어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서, “특히, 이제는 예전처럼 내수 부진을 수출로 상쇄하거나, 중국의 둔화를 동남아 시장으로 보완하던 시대는 끝났다. 판재류와 봉형강 등 주요 품목 전반이 공급과잉 상태인 데다, 건설 경기 부진까지 겹치면서 내수마저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 모두 현재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운 시점인 만큼, 지금이야말로 산업의 근본 원인을 짚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연구 및 투자 없는 경쟁력은 환상
민 교수는 국내 철강산업의 위기의 본질로 ‘투자 부재’를 꼽았다. 한때 기술격차로 벌리면서, 가성비로 승부했던 한국이 소위 말하는 일본의 품질, 중국의 가성비 사이에서 어정쩡한 포지션을 갖추게 된 것.
민 교수는 “국내 철강업체들이 일부 신 강종 개발과 함께 그간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철강 신흥국 대비 기술 투자는 부족하다”며 “설비 투자가 없으면 기술력도, 경쟁력도 없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을 게 아니라 오히려 중국에 쫓기는 입장이다. 민 교수는 “우리는 일본 불황기 동안 설비투자로 따라잡았지만, 지금은 중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며 “8년간 투자하지 않은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수요 쫒아 해외로....미니밀 중심 시대의 도래
국내 철강업체들이 국내 투자를 줄이는 대신, 해외 수요지 중심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추세다.
올해 초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에 전기로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고, 포스코 또한 미국 클리블랜드-클리프스와 전략적 MOU를 체결했다. 해외 설비투자 규모는 이미 조(兆) 단위를 넘어섰지만, 국내 설비투자 계획은 이에 한참 못 미친다. 그만큼 국내 시장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민동준 교수는 앞으로의 철강산업이 대형 고로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맞춤형 미니밀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에 주목했다. 즉, 국가별 수요에 맞춰 특정 강종을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트랜드가 됐다는 것.
나아가 민 교수는 국내 철강산업의 방향성이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민 교수는 “자금이 없는 게 아니라, 방향이 아직 없다. 해외 투자가 활발한 반면, 국내 시장의 매력은 그만큼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설비 감산으로는 철강산업 위기 못 넘어
민 교수는 최근 업계 일각에서 거론되는 ‘감산’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감산으로 국내 생산이 줄면, 그만큼 저렴한 수입 철강재가 시장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민 교수는 “한국은 중국보다 전기요금과 인건비가 높은데, 감산으로 시장을 비우면 오히려 외국산 제품이 그 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감산은 일시적인 호흡일 뿐,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국 철강산업이 가격 결정권을 잃었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관세로, 중국은 가성비로 시장을 주도하는데 우리는 그 어느 쪽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 교수는 “국내 업체들은 기술력과 품질, 시장점유율 어느 측면에서도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이다. 전기강판 등 일부 강종은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의 추격 속도는 빠르다.”라며, “고로나 전기로 모두 경쟁력을 잃은 상황에서, 감산이나 가격 조정만으로는 산업의 체질을 바꾸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부는 해법이 아니라 환경을 만들어야
국내 철강산업의 위기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민동준 연세대 교수는 정부가 직접적인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산업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 교수는 정부의 역할을 ‘지원’보다 ‘조성’에 두고, 기업이 스스로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현재 업계가 정부에 전기요금 인하나 단기 지원을 요구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단편적인 요구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며, 시장 재편과 제품 전환 등 중장기적 실행 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역시 특정 기업을 선택적으로 지원하기보다, 산업 전반이 자율적으로 경쟁력 강화를 모색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철강산업이 단기 감산에 머물 것이 아니라, 설비 고도화와 기술 혁신, 인력 재배치를 병행하는 중장기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민 교수는 철강업계가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건설·조선 등 주요 수요산업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수요 구조를 창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연구개발(R&D)의 방향도 철강을 위한 철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산업 간 연계를 통한 신수요 발굴과 제품 다변화가 위기 극복의 실질적 해법이며, 이를 통해 국내 산업의 성장 기반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