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고도화,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산업 연계’로 전환 시동
- R&D 2,000억 투입…수요산업 맞춤형 10대 특수강 육성 - 조선·車·에너지 등 산업별 강재 매칭…‘수요 중심 고도화’ - 철강 기술개발을 넘어, 수요산업과 연계한 성장 구조 구축
정부가 지난 4일 발표한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은 기술개발에 그치지 않고 수요 창출과 활용 확대를 병행한다.
이번 대책은 단순한 기술혁신이나 생산성 제고를 넘어, 조선·자동차·에너지 등 주요 수요산업과의 연계 강화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부는 철강산업을 더 이상 독립된 제조업으로 보지 않고, 산업 생태계의 중심 허브로 재정의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번 고도화 방안을 통해 특수강종 기술 개발과 함께 우수 철강재의 수요 창출 및 활용 확대를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10대 특수탄소강, 수요산업 맞춤형으로 재편
이번 방안의 핵심은 수요산업별 맞춤형 특수강 공급체계 구축이다.
정부는 조선·에너지·자동차·방산 등 주요 산업이 필요로 하는 10개 특수탄소강을 전략 품목으로 지정하고, 약 2,000억 원 규모의 연구개발(R&D)을 지원한다.
조선·에너지 분야에는 극한환경용 고기능 강재인 ▲고망간강 ▲크롬강 ▲클래드강 ▲스테인리스강 등이 포함됐다. 이들 5개 품목은 현재 기술력이 글로벌 3위 수준이지만, 2030년까지 1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자동차·방산 분야에는 경량화·고강도 특수강 중심의 ▲고규소강 ▲LCE 냉연강판 ▲저아연용융도금강판 ▲비열처리강 ▲침탄합금강 등 5개 품목이 선정됐다. 정부는 해당 품목의 생산량을 2030년까지 20~30% 확대해 시장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조선·에너지, 극한환경 맞춤형 강재 국산화
우선 조선·에너지 산업에는 극저온·고압·부식 환경에 견딜 수 있는 고성능 특수강이 집중된다.
조선 분야에서는 LNG화물창 등 차세대 선박용 고망간강 중후판이 대표적이다. 극저온에서도 인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고망간강은 향후 LNG 운반선과 수소 운반선 외판용 소재로 확대 적용될 전망이다.
에너지 부문은 고압·고온 환경용 압축·이송·주입용 강재와 초심도 시추용 무계목강관, 고출력 터빈 부품용 주단강이 개발 대상이다. 풍력, 수소 등 신에너지 설비 소재의 국산화를 통해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전략산업 공급망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자동차·방산, 경량·고강도 소재로 경쟁력 강화
자동차·방산·우주항공 산업에는 초고강도·경량화·고효율 특수강 개발이 추진된다.
자동차의 경우 연비와 전비 효율 개선을 위한 소재로 ▲고규소 전기강판 ▲LCE 냉연강판 ▲저아연용융도금강판이 꼽힌다.
고규소강은 기존 전기강판보다 규소 함량을 높여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고 자속밀도를 높인 고효율 전동기용 소재다. 전기차 구동모터의 효율을 높이는 데 핵심적이며, 생산량은 2024년 80만 톤에서 2030년 100만 톤으로 확대된다. 이는 전기차, 로봇, 풍력발전 등 전력변환 효율이 중요한 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LCE냉연강판은 고성형성·고인장 강도를 동시에 갖춘 제품으로, 차체, 샤시, 도어 등 주요 구조부품에 적용돼 차량 경량화와 충돌 안전성 향상을 달성할 수 있다. 생산량은 130만 톤에서 160만 톤으로 늘릴 계획이다.
저아연용융도금강판은 전기차 차체의 부식 방지와 도장 효율 향상에 적합한 소재로, 자동차 경량화·친환경화 트렌드에 대응하는 핵심 강재다.
방산·항공 분야에서는 비열처리강과 침탄합금강이 중심이다. 비열처리강은 구동축·조향장치 등 자동차 구동부품용 소재로, 2024년 11만 톤에서 2030년 15만 톤으로 생산 확대가 추진된다.
침탄합금강은 고출력 변속기·엔진기어 등 고응력 부품용 강재로, 57만 톤에서 70만 톤으로 늘리는 목표다.
기술개발에서 ‘수요 연계’로...산업 구조의 전환
이번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은 단순한 기술개발을 넘어, 개발된 기술이 실제 시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는 특정 산업에 국한된 지원에서 벗어나 건설·에너지 등 신시장 중심으로 수요를 확장하고, 이를 통해 철강산업의 생태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기술개발 제품이 국내 산업현장에서 실제 납품 실적(트랙레코드)을 확보할 수 있도록 ‘실증사업’과 ‘우선구매 제도’를 병행 추진한다.
또한 공공 인프라 설비의 입찰 과정이나 시방서 기준에 우수 철강재를 반영해, 개발된 소재가 단순 연구성과에 그치지 않고 조달·납품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제도적 사다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 같은 실증 기반 활용 촉진과 우선구매 제도는 향후 제정이 추진 중인 ‘철강산업발전특별법(가칭)’에도 반영될 예정이다.
아울러 관계부처들은 공공 인프라 사업과 국가 주요 법정계획에도 안전성과 품질이 우수한 철강재를 우선 활용하는 원칙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기술개발에서 ‘수요 연계’로...산업 구조의 전환
이번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의 핵심은 단순한 기술개발이 아니라 ‘수요와의 연결’에 있다.
그동안 철강산업이 공급자 중심 산업으로 머물러왔다면, 이번 정책은 수요와 함께 성장하는 산업 구조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민동준 연세대학교 교수(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TF 위원장)는 “제품 고도화는 시장 고도화와 맞물려야 한다”며, “철강산업의 고도화는 결국 철강과 수요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조선·자동차·에너지·건설 등 주요 산업이 필요로 하는 강재를 정책 기획 단계부터 매칭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철강을 단순한 제조업이나 개별 생산 부문으로 보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수요산업의 혁신을 뒷받침하는 기반 산업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이는 단기적인 실적보다 중장기 경쟁력 확보와 산업 구조의 체질 개선을 겨냥한 접근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철강이 ‘공급자 중심 산업’에서 ‘수요와 함께 성장하는 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