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고급 철강재가 몰려온다
한국 철강업계는 지금 저가 중국산 막기에 한창이다. 중국산 열연과 후판이 국내 철강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며 반덤핑(AD) 제소에 나섰고, 이제는 봉강까지 AD 제소를 준비 중이다.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그런데 이번 중국 출장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고급재도 남아돌아요. 공급과잉이 심각합니다”. 중국산 저가 철강재만 문제인 줄 알았는데, 고급 철강재도 공급과잉이 심각하다니 섬뜩했다.
대표적인 게 전기강판이다. 중국은 전기강판 분야에서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오산강철, 안산강철, 티스코, 수도강철, 마안산강철 등 대형 국유 철강사들이 전기강판 설비를 앞다퉈 늘렸고, 사강·이마그룹 같은 민영기업도 설비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24년 중국의 전기강판 생산능력은 1,800만 톤. 그런데 2026년이면 2,480만 톤까지 치솟는다. 수요 증가가 연간 50만~70만 톤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수요를 훨씬 웃도는 수준으로 공급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더 놀라운 건 설비 대부분이 2010년 이후에 지어진 최신 라인이라는 점이다. 기술력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바오산강철은 2008년 방향성 전기강판을 자체 개발해 대량 생산에 성공했고, 2024년에는 자체 개발한 B23P080, B20HS070, B18HS075, B18HS070 등 고급 전기강판 제품을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또한 국내 최초로 고급 무방향성 전기강판 연속압연 기술을 확보해, 1550mm 산화연속산세라인에서 실리콘 함량 3.1% 이상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해당 설비는 35A270 이하 전 등급을 커버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더해 고급 전기강판 생산에 특화된 6기연속압연기 라인을 구축한 상태다.
수출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 중이다. 2024년 중국의 전기강판 수출량은 144.7만 톤, 순수출량은 129.8만 톤을 기록했다. 순수출량이 100만 톤을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가운데 방향성 전기강판은 64.2만 톤(순수출 56.6만 톤), 무방향성 전기강판은 80.5만 톤(순수출 73.2만 톤)으로 모두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고급 철강재 공급과잉은 이미 현실이 됐다. 이대로 가면 가격을 낮춰서라도 물량을 소진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주변국에 대한 덤핑 판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당장은 우리가 저가 중국산에 맞서고 있지만, 고급 중국산과 경쟁해야 될 날도 머지 않았다.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길 준비도 필요하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그때는 이미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