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폐 위기 맞은 철근 기준價 협상 (下)

- 협정 기준價 없으면, 실수요·유통 거래 ‘큰 혼선’ - 건자회 단호한 입장 표명..선택 고민 깊어진 제강사 - 의도치 않은 대결구도, 향배 촉각..3분기 혼선 ‘불안’

2017-06-22     정호근 기자
철근 기준가격 협의체의 위기설이 본격화된 것은 5월 하순이다. 그럼에도, 철근-건설 업계는 대응책 마련을 위한 공론조차 나서지 못했다. 극도의 신중한 태도로 시장 안팎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 누구도 편치 않은 공정위에 대한 조심스런 입장과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 철근 기준價 존폐를 걱정하는 시장

철근 기준가격의 존폐 위기는 엄밀히 말해 협상을 통한 협정가격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기준가격은 협상 체제 이전처럼 철근 제강사가 얼마든지 발표할 순 있다. 문제는 철근-건설업계 사이에서 신뢰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온 협정가격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충돌과 혼선이 시작된다.

가장 큰 혼선이 예상되는 시장은 가공 실수요다. 철근 시장의 대세가 된 가공 실수요는 ‘납품 시점의 기준가격-할인폭’의 가격구조로 거래되어 왔다. 장기계약에서 발생하는 거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나름 합리적인 대안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다. 생산원가와 시장상황을 반영한 기준가격 협상으로 장기계약의 부담을 덜되, 할인폭으로 경쟁의 변별력을 보완한 것이다.

만약 협정 기준가격이 없어진다면, 가공 실수요 거래시스템은 한꺼번에 무너진다. 당장 3분기부터 새로운 기준가격을 적용해야 하는 신규 발주·수주를 어떻게 할 것이냐. 또, 이미 1년 치 이상 계약된 물량의 가격은 어떻게 조율하고 결정할 것이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크게 바뀐 철근 시장의 수요구조도 부담이 커진 이유다. 철근-건설 업계가 기준가격 협상을 시작한 2011년 이후 장기계약 형태의 가공 실수요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본지 조사 기준, 2011년 전체 철근 수요의 25.6%(220만톤)를 차지했던 가공 실수요는 2016년 43.0%(500만톤)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올해를 기점으로 가공 실수요는 비(非)가공 수요를 넘어설 전망이다.

▲ 스틸데일리DB

가공 실수요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만큼, 기준가격의 역할도 커졌다. 협정 기준가격이 없어질 경우, 철근 시장이 감당하기 힘든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이 때문이다.

철근 유통시장은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커질 전망이다. 고착화된 선판매·후정산 구조에서 어떤 기준으로 판매할 것이냐. 즉, 예측판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유통업체 입장에서 원가 예측과 판매단가 책정, 재고조절 등 유통거래 전반의 판단이 어려워진다.

거래처에 휘둘릴 가능성도 높다. 제강사와 건설사, 재유통 업체들 사이에서 갈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제강사로부터의 구매와 건설사에 대한 판매에서 각각의 거래를 조율하기 힘들어지는 문제다. 판매를 의존하고 있는 재유통 업체들의 흔들기도 심해질 수 있다.

수입산 철근 시장은 국내산 철근 가격에 대한 예측력이 떨어지는 것 외에, 당장의 거래혼선이나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 철근 시장은 어떤 대안을 찾고 있는가

철근 시장은 기준가격 문제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복잡한 얽힌 시장의 문제를 풀어낼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방향에 대한 공감대조차 나누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철근 제강사 가운데 명확한 입장을 밝힌 곳은 현대제철 뿐이다. ‘협상 불가’와 ‘개별 기준가격 발표’ 방침으로, 공정위의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다. 아직 방침을 정하지 못한 여타 제강사들은 현대제철과 건설업계의 태도를 관망하는 눈치다.

▲ 건자회, “거래파행 막기 위한 신뢰 유지 중요”
건자회는 단호한 입장으로 선택의 공을 제강사 쪽으로 넘겼다. 지난 20일 총회에서 기준가격 관련 현안을 집중 논의한 결과다.

건자회 측은 담합 조사를 받고 있는 철근 제강사의 불편한 입장은 이해하지만, 상호신뢰가 깨지지 않는 현실적인 범위에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핵심적인 입장은 ‘직접 협상은 하지 않더라도, 기존 가격공식을 토대로 기준가격이 유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3분기 기준가격은 가격공식의 결과대로, 톤당 3만원 선의 인하요건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건자회 관계자는 “철근 제강사가 자의적으로 정한 기준가격은 인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래신뢰를 깨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며 수용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상호신뢰와 공감대가 없다면, 거래파행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가격협상 이전의 갈등이 재현될 수 있다”고 날을 세웠다.

공정위의 시각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건자회 관계자는 “철근 기준가격 협상이 업계 간 담합의 의도였다면, 치열하게 협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공정위도 당장의 거래파행을 바라는 지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장의 현실에 비춰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아직 조사를 끝내지 않은 공정위의 명확한 입장 확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시장의 혼선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책을 찾는 것이 옳다”며 “공정위의 최종 조사결과를 지켜보고, 필요하다면 현실적인 대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딜레마에 빠진 제강사, ‘중요해진 선택’
건자회의 선방으로 철근 제강사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고 있는 공정위와 막강 수요처인 건설업계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힘든 처지가 됐다. 다만, 철근 제강사들은 “자체적인 기준가격을 고민하는 것은 공정위의 지적을 반영한 것일 뿐, 거래이익을 늘리기 위한 속셈이라는 건설업계의 해석은 과도한 억측”이라고 피력했다.

철근 제강사의 선택은 중요해졌다.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택한 현대제철의 고민도 끝나지 않았다. 기존 협상의 틀을 벗어난 기준가격을 발표하면, 수요처인 건설업계에서 돌아올 역풍이 큰 부담이다. 건자회의 주장대로 기존 가격공식 대로 기준가격을 발표하면, ‘경쟁을 저해하는 동일한 출발점(기준가격)을 공유했다’는 공정위의 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원점이다.

아직 방침을 고민하는 다른 제강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제철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기준가격을 발표하는 것도, 공정위의 지적을 외면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 뜻밖의 구도, 판세 변화 촉각..“3분기 출발은 혼선”

협정 기준가격의 존폐 문제가 의도치 않은 구도로 흐르게 됐다. 선제적인 방침을 정한 현대제철과 완강한 태도를 밝힌 건설업계의 대결구도다. 방향을 고민하는 여타 철근 제강사들의 선택에 따라 힘의 균형이 바뀔 수 있을 지도 촉각을 곤두세울 일이다.

철근 시장의 고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변수에 따라 방향성과 판세가 바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큰 틀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준가격 관련 현안들의 귀추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3분기 철근 시장의 혼선이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며칠 남지 않은 2분기 동안 말끔하게 풀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철근 시장은 이번 현안을 계기 삼아 보다 합리적인 가격체계로 개선되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