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현대제철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현대제철이 철근 기준가 협상에서 이탈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철근 업계 전체가 들썩였다. 협상 파트너인 건자회는 물론이고 협상에 함께 나서는 동국제강, 현대제철이 진행한 협상 결과로 철근을 팔아야 하는 제강사들과 유통업체들까지 현대제철의 파격행보가 미칠 영향을 따지느라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왜 그랬을까?

현대제철이 분기별 기준가 협상에서 빠진 건 5년만이다. 지난 5년간 철근의 생산과 판매, 유통의 전 과정에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바뀐 환경은 분기별 기준가 협상은 더 이상 효과적인 가격 책정 방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생산 원가의 폭등이다. 전극봉과 페로바나듐 등 부자재 가격의 폭등으로 철근의 생산 원가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현재의 가격 결정 공식은 부자재 가격을 반영하지 않는다. 공식은 부자재 가격이 안정적이던 당시에 원자재인 철 스크랩의 가격 변동만으로 기준가를 결정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은 지난 4분기 기준가 협상에서도 부자재 가격을 기준가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협상에서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부자재 가격 폭등으로 생산 원가가 상승하는 동안 현대제철을 비롯한 제강사들은 수익성 저하를 감수해야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규제도 부담스러운 요소다. 현대제철은 동국제강과 함께 협상에 나서면서 정작 같은 테이블에는 앉지 못한다. 제강사들은 공정위가 보내는 가격 담합 의심의 눈초리를 두렵기 때문이다. 함께 협상에 나서면서 동국제강과 정보를 공유할 수도 없는 불편한 협상 상황도,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가격을 결정하면 다른 제강사들이 그 가격을 따르는 시장상황도 가격 담합을 우려하게 만든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제강사들 간의 정보교류를 극도로 조심하고 있지만 언제든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준가가 얼마로 정해지든 구매자와 판매자가 협상을 통해 가격을 책정하는 과정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지적 역시 꾸준히 있어왔다. 사실 협상을 통한 기준가 책정은 가격의 이중 책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구매자인 건설사는 철근을 살 때마다 입찰을 진행한다. 따라서 기준가 책정에서 한 번, 입찰과정에서 또 한 번 가격을 결정하는 셈이다. 기준가격이 입찰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가격이 두 번 책정되는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기준가의 순기능보다 시장의 혼선을 초래하고 수익성을 저해하는 등의 역기능이 더 많다는 의견이 제강업계에 널리 퍼져있기도 했다. 결국 현재 공급 부족으로 인한 판매자 우위의 시장 상황에서 현대제철이 불리한 거래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강공 드라이브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될까?

문제는 판매자가 우위에 있는 시장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동국제강을 비롯한 다른 제강사들이 어떤 태세를 취할지 역시 알 수 없다. 결국 관건은 동국제강이 현대제철의 강공 드라이브에 동조할 것이냐 여부다. 동국제강은 27일 종일 대책마련을 위한 고심에 들어갔다.

동국제강은 쉽게 입장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대제철이 빠진 상황에서 협상을 단독으로 진행하는데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전해진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시장의 혼란을 최소화 하기 위해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모여있다”고 말했다.

현대제철이 단독으로 가격을 결정해 통보한 상황에서 동국제강이 협상을 지속할 경우 시장엔 2개의 가격이 형성된다. 혼란이 가중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동국제강도 현대제철에 동조해 협상에서 빠져나올 경우 현대제철의 강공은 성공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캐스팅보트는 동국제강이 쥐고 있는 셈이다.

일각에선 ‘현대제철이 먼저 치고 나간 상황이라 동국제강은 큰 피해없이 종래의 불리했던 건설사와의 거래 관행을 청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분석도 나온다. 협상을 통해 결정된 기준가로 인해 수익성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동국제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동국제강이 현대제철에 동조하면 현대제철의 드라이브에는 한 층 힘이 실린다.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협상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가격을 책정하면 구매자로서는 울며겨자먹기로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제시한 가격에 철근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생산량 1, 2위의 업체들이 가격을 결정해 시장을 주도하면 다른 제강사들도 그 가격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 한 제강사 관계자는 “그동안의 관행에 비추면 혼란이 오겠지만 결국 시장경제의 원칙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업계 전체의 수익을 끌어올리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다.

잘 될까?

문제는 급격한 가격 책정 방식의 변경이 불러올 혼란의 수습이다.

당장 계약된 실수요 향 가공철근 물량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된다. 건설사 입장에선 건자회와의 협상이라는 가격 책정의 근간을 파기한 현대제철의 일방적인 가격통보를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미 계약된 물량을 물릴 수도 없고 계약 내용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약은 기준가를 근거로 할인폭을 결정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때문에 제강사의 가격을 얼마로 볼 것이냐에 따라 건설사의 구매비용은 널을 뛴다.

이번 기준가 협상에서는 인하요인이 1만 4,000 원 가량이다. 가격 동결로 건설사가 1만 4,000 원을 비싸게 살 경우 물량이 10만 톤만 돼도 14억 원에 달한다. 계약 내용의 해석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쟁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금액이다.

건자회가 표명한 ‘강경 대응’ 입장도 문제다. 건자회 관계자는 “현대제철의 일방적인 가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 결국 현대제철이 제시한 가격으로 철근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체 철근 생산량에서 현대제철의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건설사가 현대제철의 철근을 구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대제철의 매출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쟁점은 발생한다. 건자회의 강경 대응이 어떤 형태일지 알 수 없지만 결국 현대제철의 철근을 구매하지 않는 형태로 발현되면 이를 ‘구매담합’으로 이해할 여지도 발생한다.

다양한 분란의 소지에도 현대제철이 둔 강경 행보는 제강사들의 수익성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동국제강을 비롯한 다른 제강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짐작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제철이 앞장을 서면 다른 제강사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란 짐작이다.

국면이 제강업계와 건설업계의 대립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대립 국면에서 현대제철의 초강수가 성과를 거둔다면 제강업계는 오래 골머리를 앓아오던 문제를 단 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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